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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역사 무역의 중심 그리고 리콴유

by 머니클라쓰 2023. 9. 28.

무역의 중심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싱가포르는 중국 인도 중동 사이에 위치한 무역항입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주변국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14세기 중반 마자파히트 왕국에게 정복당한 후 싱가포르는 완전히 몰락합니다. 마자파히트 왕국에게 정복당하기 전 싱가포르의 왕은 말레이시아로 피난을 떠났고 말라카에 정착하면서 다시 국가를 세웠습니다. 말라카는 빠른 속도로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했고 싱가포르를 다시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무역의 중심은 말라카가 되었고 싱가포르는 선박을 건조하는 기지 역할만 했습니다. 15세기말이 되면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됩니다. 포르투갈은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유럽의 변방이었기에 강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아시아 지역에서 무역을 하기로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말라카를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1511년 말라카를 침략해 정복합니다. 1613년 싱가포르까지 침공해 싱가포르에 관한 기록을 전부 없애버렸습니다. 포르투갈에 의해 파괴된 싱가포르는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며 점차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번성했던 무역기지의 모습은 한동안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무역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은 말라카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의 역사

포르투갈 다음으로, 아시아에 진출한 유럽 국가는 네덜란드였습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교역로와 거점들을 빼앗기 시작했고, 1641년 말라카까지 빼앗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는 19세기 초까지 네덜란드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1795년에 영국으로부터 말라카를 빼앗기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시기의 싱가포르는 크게 개발되지 않았으나 19세기 초 영국이 싱가포르 개발을 시작하면서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토마스 스탠퍼드 레플스는 조호르 술탄국과 계약을 체결해 싱가포르를 할양받았고 후에 싱가포르는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고무와 주석 무역의 항구로서 번성했고, 1842년 난징조약과 1869년 수에 주 운하 계통 등의 호재가 터지면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싱가포르로 몰려드는이주자들로 인해 싱가포르의 인구는 급증했습니다.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민족들도 싱가포르로 향했습니다. 이 시기 싱가포르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발돋움했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싱가포르는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싱가포르에 주둔해 있던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일본이 폭동 진압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싱가포르에 대한 검은 야욕을 드러내었습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싱가포르를 방어할 여력이 없었죠. 194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지배는 일본이 패전하면서 1945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본은 싱가포르를 지배하면서 중국계 주민 약 5만에서 1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리콴유 개혁과 독재

1946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싱가포르인들은 영국에게 자치권을 요구했고, 싱가포르는 1959년 인민행동당의 리콴유를 초대 총리로 하는 자치 정부를 수립해 4년 뒤인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정책 전반에서 의견차를 보였고 결국은 민족적인 문제로 연방에서 탈퇴를 당했습니다. 당시 주변에서는 싱가포르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힘든 시기를 겪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초기에는 모두의 예상대로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1965년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가 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과감한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기 시작합니다. 리콴유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 국민들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공공아파트 보급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90퍼센트 이상의 싱가포르인들이 자기 소유의 주택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깨끗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도시와 환경을 깨끗하게 정비한 후 이를 훼손하는 행위를 하는 국민들에게 높은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공무원이 비리를 저질렀다가 발각되면은 전 재산을 몰수당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들은 싱가포르를 발전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싱가포르는 일당 독재 체제였으므로 리콴유는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과감한 정책들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은 국민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며,. 그의 통치 방식은 일면 억압적이고 가혹한 측면이 많았습니다. 언론은 정부의 검열로 인해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민주주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척박하고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리콴유라는 것에는 큰 반론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리콴유는 1990년까지 장기 집권했고, 현재는 그의 아들인 리센룽이 2004년부터 총리가 되어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