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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앙코르 와트 그리고 크메르인

by 머니클라쓰 2023. 9. 23.

앙코르와트

캄보디아와 앙코르 와트의 미묘한 관계

앙코르 와트의 나라, 캄보디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보존과 보호가 필요한 곳입니다. 내부는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림과 동상은 크메르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와 크메르 문화를 상징하는 이 사원은 2019년에 외국인 관광객이 661만 명이나 방문할 정도로 캄보디아의 역사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앙코르 와트를 중심으로 한 관광 수입은 2018년을 기준으로 43억 달러이고, 캄보디아 GDP의 6분의 1에 해당합니다. 캄보디아가 독립한 이후로 캄보디아 국기에는 항상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었으며, 이것은 앙코르 와트가 캄보디아에서 특별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이는 앙코르 와트를 단순히 세계적인 관광지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인들의 역사적 자부심과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앙코르 와트의 역사와 특징

앙코르 와트의 '앙코르'는 크메르어로 '왕조, 왕도'를 뜻하며, '와트'는 '사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는 왕도의 사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사원은 크메르 제국의 왕인 수르야바르만 2세가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동원해 30여 년 동안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동서남북 길이가 약 1㎞로 동북아 최대 도시였던 중국의 장안성의 크기에 견줄만합니다. 식량 생산을 위해 논을 만들어 약 40만 명의 주민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앙코르 와트의 특징 중 하나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연못은 폭 190m, 길이 5.4㎞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하며, 사원은 서쪽을 향해 사후 세계를 상징하는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지금은 세계 최대의 불교 사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습니다. 수르야바르만 2세가 힌두교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수메르 산을 본떠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크메르인들의 전성기인 12세기부터 13세기 초에는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메콩강과 크메르인의 역사

현재는 태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라고 불리지만, 태국인과 베트남인은 이 지역의 역사가 시작될 당시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의 역사는 크메르인들이 중심이었던 서기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크메르인들이 주도했습니다. 이는 메콩강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크메르인들 때문입니다. 메콩강은 아주 큰 강이라는 뜻이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크메르인들은 메콩강 지역을 먼저 점령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지역은 인도차이나의 역사가 시작된 서기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들이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부남/후난 왕조(서기 1~6세기), 진랍/첸라 왕조(6~8세기), 그리고 크메르(앙코르) 왕조가 번갈아가며 인도차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들 모두가 캄보디아인들의 직계 조상이었으며,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고 불교로 개종하는 시기는 크메르인들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나 크메르인들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사원 건설과 경제적인 쇠퇴, 몽골 제국의 침공 등 여러 이유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개활지의 비극'이 크메르인들의 역사적 비애를 좌우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메콩강 지역은 비옥한 토지이지만, 방어하기 어려운 입지였기 때문에 이주민과 침입자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15세기에는 크메르 왕조가 타이인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으로 멸망했습니다. 이후 잠시 동안 다시 나라를 세웠지만, 서쪽 지역은 타이인들에게 빼앗겨 수도를 옮겨야 했으며, 동쪽에서는 베트남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크메르인들의 역사와 전통문화는 여전히 캄보디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았지만,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앙코르 와트 역시 정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출신의 박물학자 앙리 무오가 앙코르 와트를 발견하기 전까지, 캄보디아는 스스로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태국과 베트남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국가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지역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식민 지배의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캄보디아에게는 한 줄기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